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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아카] 폭염

HQ 2016. 8. 6. 23:26

 

 아카른 전력 60분 : 폭염

 

 

매미 우는 소리가 들린다. 햇빛이 체육관 천장을 녹여버릴 기세로 쏟아졌다. 아카아시는 차분한 성격 덕분인지 서늘해 보이는 이미지였지만 실상은 더위에 약한 편이었다. 가뜩이나 더위에 약한데, 폭염주의보가 내려졌다. 아까부터 컨디션이 말이 아니었다.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토스가 잘 되지 않았고, 종종 공을 엉뚱한 곳으로 보내버렸다. 선배들은 괜찮다, 그럴 때도 있지, 신경 쓰자 마- 라고 돌아가며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그럴 수록 더욱 신경이 쓰였다.


"헤이 헤이 헤이!"


"후하- 끝내주게 잘 들어간다!"


에이스는 컨디션이 저렇게 좋은데 자신은 이 모양 이 꼴이니, 신경 쓰이는 것이 당연했다.


"잠깐 휴식. 얼음물 가져왔으니까 다들 수분 보충해."



세트를 마치고 겨우 휴식 시간이 되었다. 잠시 쉬는 틈을 타서 벽에 등을 기대는데, 다리에 힘이 풀려서 미끄러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하루 연습량을 생각해보면 아직 두 게임 정도를 더 뛰어야 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생생해 보이는 보쿠토의 얼굴을 보면, 자율 연습도 상당히 긴 시간 동안 이어질 것 같았다.


팀원들 돌아가면서 물을 마시고, 타월로 땀을 훔쳐냈다. 다음 세트 동안 또 한참 뛸 것을 생각하면 자신도 수분을 보충하러가야 했지만 몸이 너무 무기력했다. 몇 미터 되지도 않는 거리일 테지만, 매니저 선배들이 가져온 아이스 박스는 저 멀리 있는 신기루 같이 느껴졌다. 입안이 거칠거칠 하고 더운 숨을 올라왔다. 며칠 동안이나 물을 못 마신 사람처럼 갈증이 일었다. 물을 마시면 해결 될 일인데 조금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누가 좀 가져다줬으면, 하고 생각하는데 보쿠토 선배와 눈을 마주쳤다. 부엉이를 닮은 얼굴은 수분을 보충하고 난 뒤라 그런지, 한결 더 생생해져 있었다.


"아카아시! 나 오늘 어땠어? "


보쿠토의 목소리가 체육관 내에 울려 퍼지자 팀원들은 못 말린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아카아시는 보쿠토처럼 큰 목소리를 낼 기운이 나지 않아, 자기 쪽으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한 학년 위의 선배를 오라 가라 하는 그가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체육관 내의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눈에 아카아시가 보쿠토를 부르는 것은 아이 엄마가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아들을 부르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럽게 보였다. 보쿠토는 기분이 좋은 듯 성큼성큼 아카아시에게 갔다. 꼭 놀이터의 모래로 그럴 듯한 성을 쌓아 놓고, 칭찬해 주길 바라는 아이 같은 모양새였다.


"나 오늘 잘하지 않았어?"


보쿠토는 들고 온 물통을 아카아시에게 건넸다.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니 숨이 좀 트이는 것 같았다.


"괜찮았어요. 스트레이트도 깔끔하게 치셨고."

"그렇지? 우연이지만!"


아카아시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보는 보쿠토에게 그가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면서, 그의 뒤편에 있는 팀원들의 눈으로 쫓았다. 몇몇 팀원들은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고 있었고, 보쿠토를 제외한 3학년들은 1학년 팀원들의 서브를 봐 주고 있었다. 후쿠로다니의 연습량은 도쿄 내에서도 고되기로 유명한데, 무더위 속에서 지쳐 보이는 사람 한 명 없었다. 다들 언제나 체력이 넘치는 에이스와 함께 배구를 해오면서 단련된 듯 싶었다.


아카아시는 뭘 먹고 자라면 저렇게 기운이 넘칠까 싶어 새삼스레 보쿠토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팀원들이 하나 둘 네트 주위로 모이는 것이 보였다. 슬슬 게임을 다시 시작 하려는 모양새였다. 아카아시도 휴식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순간 시야가 핑 돌았다. 바닥이 출렁이면서 균형 감각이 무너지고, 몸이 한 쪽으로 기울었다.


"아카아시!"


제 이름을 부르는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물속에 잠겨있는 듯 시야가 흔들리고, 머리가 지끈지끈 했다.


"아카아시! 어디 아파? 괜찮아? 얼마나 아픈 건데! 병원 갈까?"



단단한 팔이 몸을 받쳤다. 커다랗게 뜨인 황금색 눈이 울망울망해져 있었다. 유난히 해맑고 활기찬 모습이었는데, 겨우 이런 일로 저런 표정이 되어버리다니. 저러다가 텐션 떨어지시면 안 되는데. 아카아시는 보쿠토의 팔을 잡고 천천히 몸의 균형을 되찾았다. "이제 괜찮아요." 라고 말하며 팔을 놓는 순간, 시야가 다시 일그러졌다.


아카아시가 쓰러지듯 풀썩 주저앉자 보쿠토의 눈빛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소란스럽던 기세가 줄어들자 다른 부원들도 무언가 이상을 눈치 챘는지 보쿠토와 아카아시 주위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설마 싸우는 건 아니지?"

"뭐야, 아카아시 다쳤어?"


코미와 코노하가 차례대로 물었다.


"너희는 돌아가서 경기 진행해. 거기 앉아있는 1학년 둘, 나랑 아카아시 대신 들어가."


"아니, 전 괜찮은..."

"괜찮긴 뭐가 괜찮아."


아카아시는 "잔말 말고 업혀." 라며 등을 내미는 보쿠토의 목에 얌전히 팔을 감았다. 아카아시는 이럴 때의 보쿠토를 대하기 어려웠다. 텐션이 너무 업 되서 방방 날뛰면 가라앉히면 되고, 풀이 죽었을 때면 잘한 점을 칭찬해주고 다독여주면 되는데, 이렇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보쿠토 선배라니. 제가 컨디션 관리 못해서 화가 난 걸까 싶었다.


체육관 밖으로 나오자 여름 햇살이 집요하게 두 사람을 쫓았다. 습하고 뜨거운 공기에 기운이 더 없어졌다.


"아카아시. 팔에 힘 제대로 줘."


여전히 무뚝뚝한 보쿠토의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네- 라고 대답하면서도 무기력하게 팔을 늘어뜨렸다. 화나신 건가, 아닌가. 역시 잘 모르겠다. 알지 못 하는 것은 답답하다. 체육관 안이나 밖이나 찌는 듯 한 더위는 여전했다. 머리가 다시 지끈거렸다. 아카아시는 신음이 절로 나오려는 것을 참고,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


양호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크게 다친대도 없으니 딱히 양호 선생님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올 때마다 자리를 비워두셔도 되는가 싶다. 보쿠토는 아카아시를 침대에 내려놓고 얇은 이불을 목까지 덮어주었다. 그러더니 에어컨 리모컨을 찾아와서 에어컨을 틀었다. 한창 폭염에 시달리다가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쏟아지자 몸이 움찔했다. 침대가 흔들렸다. 옆에 앉아있던 보쿠토는 아카아시의 상태를 알아챈 듯 "추워?" 라고 물으면서도 이미 리모컨으로 적정 온도를 맞추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편은 절대 아니었는데, 이런 건 또 잘도 알아차린다. 그냥 감이 좋으신 건가.


보쿠토는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 아예 침대 옆 의자에 자리 잡고 앉았다. 곧 있으면 합숙도 있고, 오늘은 유난히 컨디션도 좋아 보였는데,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이제 괜찮아요. 가보셔도 돼요."


아카아시가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건네자 보쿠토는 싱긋 웃었다. 마치, 자신이 그런 말을 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피곤하면 좀 자. 너 잠들 때 까지 옆에 있을게."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손길을 느끼며 아카아시는 눈을 내려 감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의지가 된다니까….'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어느 날, 잠이 스르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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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프오웨

,

[엔노아카] 인터뷰

HQ 2016. 8. 6. 23:24

 

 

 

눈을 떠보니 창밖은 이미 어둑어둑 했다. 전날에 그동안 개봉된 영화를 모니터 하다가 해가 뜨고 난 뒤 잠들었더니, 낮이 사라져버렸다. 시간을 확인해 보려 휴대폰을 켜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엔노시타가 보낸 메시지였다. 00시 00번에서 하는 프로그램를 봐달라고. 예능 프로 잘 안보는 것 알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왜 이런 연락을 했을까 생각해보니, 며칠 전 <씨네65>라는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프로라고 들었다. 메시지를 온지 3시간쯤 지났는데, 다행히 프로그램이 시작하기 전 이었다.


AK 방송에서 인터뷰하는 건 며칠 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동안 그런 인터뷰는 한사코 거절해서 싫어한다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싫어한다기보단 오히려 들떠보이는 표정이었다. 사실 재방송으로 보거나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를 들을 셈이었는데, 정시에 맞춰서 봐 달라는 연락이 와 있었다. 방송에서 짖궂은 질문이 나오면 전화 찬스라도 할 예정인가.


아카아시는 밖에서는 철두철미한 편이었지만 집 안에서는 무기력한 편 이었다. 일이 없이 집에 있는 날이면 늦은 오후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서 소소한 일상을 보낸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틀어 놓고 몇 시간 동안 멍하니 있는 것처럼 머리 쓰는 일은 전혀 하지 않는 주의였다. 오랜 시간 동안 알아온 엔노시타가 그러한 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메시지를 보냈을까.


답장이 안 오면, 그냥 전화해도 되는데.


함께 일해 온 시간도 꽤 됐는데, 거리를 두고 그 이상 다가오지 않으려 하는 것은 여전했다. 거리를 두는 것은 아카아시도 마찬가지였기에 쓸데없는 배려라고 비난할 수 만은 없었다.


아카아시는 소파에 앉아 평소엔 장식용으로 걸려있던 TV를 틀었다. 리모컨으로 원하던 채널을 누르자 막 방송이 시작됐다.


/


-오늘 소개해 드릴 분은 젊은 나이에 많은 분들께 사랑을 받고 있는 분인데요. 바로 영화계의 새로운 바람, 엔노시타 감독님과 함께합니다.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씨네65 여러분.


-그동안 예능 프로에 한 번도 참여하시지 않았다고 들었는데요. 저희도 모시기 꽤 힘들었는데, 신비주의를 고집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신비주의라기보단, 조용한 성격이라서 그래요. 화면에 직접 나오는 것보다는 화면 안의 세계를 조정하는 쪽이 익숙하네요.


-과연, 영화 감독님다운 말씀이시네요. 고등학교 때, 배구를 하셨다고 들었는데요. 팀의 주장이셨다고. 어느 학교 팀에서 활동하셨나요?"


-카라스노 배구팀에서 활동했습니다.


-카라스노요? 카라스노는 분명 xx 연도에 우승한 강호교였는데, 그 팀의 주장이셨다니! 그럼 배구 실력도 상당하실 것 같은데 메이저 선수의 길을 갈 욕심은 없으셨나요?


-그해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던 건 천재 세터와 에이스, 그리고 든든한 부원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구를 좋아하지만, 메이저 선수가 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노력해서 될까 안 될까 가능성을 재보고, 그런 성격입니다.


-배구 쪽에 뜻이 없으셨다면, 주장은 3학년으로서 부담스러운 자리이셨을 것 같네요.


-부담이 없지는 않았지만, 주장을 하기로 선택한 일은 지금도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태를 관망하는 시야와 협동심, 무엇보다도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는 뜻 깊은 활동이었습니다.


-영화계 쪽에는 어떻게 입문하게 되셨나요?


-꿈을 정하고 나자, 곁에서 응원해준 친구가 있었어요. 각본을 쓰면 냉정하다 싶을 만큼 꼼꼼한 피드백을 주고, 촬영도 도와주고. 덕분에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감독님 영화를 좋아하는 독자로서, 저도 그 친구분께 감사 인사를 전해드리고 싶네요. 


-나중에 전해드릴게요.


-전해주신다면 감사합니다. 엔노시타 감독님께 영화란 무엇인가요?


-영화란 화면 안의 배우들과 화면 밖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 말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나요?


-영화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힘든 촬영에 불평 않고 임해주신 배우분들, 조명과 소도구, 메이크업,배경 음악을 준비해주신 분들,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난 뒤 감상을 남겨주시는 독자 분들까지, 모두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케이지,항상 옆에 있어줘서 고마워. 사랑해.


-카메라 감독님과 끈끈할 만큼 사이가 좋으시다더니, 정말이신가 보네요.


-그렇죠, 뭐. 작품 때마다 동거 동락하는 사이인걸요.


-네, 저희도 감독님과 카메라 감독님의 사랑을 응원하고, 앞으로도 훌륭한 콜라보 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 지금까지 씨네65 였습니다.



마무리 멘트 이후로 익숙한 화면이 나왔다. 전날에 잠들기 전까지 보고 또 본 영화의 예고편이었다.





~ 씨네65의 금주 추천 영화 ~


<크로우즈 엔젤스>


-각본 & 감독 : 엔노시타 치카라

-촬영 : 아카아시 케이지

-미술감독 : 카마사키 야스시

-음악 : 나리타 카즈히토


-출연 : 타나카 사에코, 시미즈 키요코, 야치 히토카, 아즈마네 아사히, 타케다 잇테츠




/


프로가 끝나고 시끄러운 광고가 몇 번이나 이어졌지만 아카아시는 TV를 끌 생각을 하지 못 했다.


그동안 미적지근하더니, 방송에서 저런 말을 할 만한 배짱이 있었나. 세터 출신으로써 눈썰미가 꽤 좋은 아카아시였지만, 엔노시타는 어려운 상대였다. 그는 아카아시가 여기까지인 사람-이라고 규정지으려 할 때, 늘 그 기대를 뛰어넘었다. 아카아시는 그 때마다 엔노시타에게 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런 기색을 겉으로 내비친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이번에도 그럴 예정이다. 냉정해지자.


소파 한 구석에 널려있는 휴대폰을 들었다. <방송 잘 봤어. 나도 ㅅ- > 메시지를 입력하던 손이 멈췄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었다. 침착하고, 담담하게. 보내려던 문자에서 몇 글자를 지운 뒤, 익숙한 번호에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나도.’


To. 치카라








참고: [사진] 엔노시타 치카라 감독님의 영화들

http://www.oeker.net/m/bbs/board.php?bo_table=comic&wr_id=377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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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프오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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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아카] 비밀

HQ 2016. 8. 6. 23:22


 



/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새로운 메시지가 왔는지 휴대폰에 파란색 불빛이 깜박거렸다. 폰을 확인해보자 'B'로부터 온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메세지를 다 읽고 난뒤 아카아시는 눈을 내리감았다. 어떻게 해야할까. 아카아시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생각을 거듭하다가, 결국 자신의 '비밀 메이트'인 'B'에게 답장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알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생각지도 못 한 방향으로 튀어버리네.





To. B


  메시지는 잘 받았습니다. 어떠한 이유인지 잘 모르겠지만, B씨가 힘들어 하시는 것이 전해지는 듯 해서 마음이 좋지 않       네요. 저도 연애 쪽은 경험이 없어서 별로 좋은 조언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From. A




아카아시에게 'B'는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들어 나무 위에 수를 놓는 햇살처럼, 'B'는 자연스럽게 아카아시의 일상으로 들어왔다.


아카아시가 반 친구들로부터 Secret mate라는 앱을 소개받은 것은 2주일 전의 일이었다. 그날 밤,단순한 호기심으로 접속하고 처음 만나게 된 사람이 'B' 이다. SNS상에서 얼굴도 모르는 낯선 이와 비밀을 나눌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와 메세지를 몇번 주고 받다보니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뜻이 맞았다. 쉽게 질릴것이라 생각한 것과는 달리,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 받게 되었다. 그와 연락하는 시간은 부활동이 끝나고 귀가한 뒤, 주로 밖이 캄캄해진 밤 시간이었다.상대방도 비슷한 생활을 하는지, 연락 텀이 길어지는 상황은 별로 없었다. 픽 웃음이 번져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


아카아시가 'B'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은 우연이였다. 이틀 전, 부활동을 마치고 학교에서 샤워를 하고 나왔다. 개인 캐비닛을 열고 옷을 갈아입고서는 'B'에게 '곧 집에 돌아갑니다.' 라고 메세지를 보냈다. 가방을 챙기려고 뒤로 돌자 캐비닛 하나가 덜렁덜렁 열려있는것이 보였다. 언뜻 봐도 대충 던져놓은 져지와 가방, 휴대폰과 잡지까지 안쪽이 훤히 보였다.


아무리 부원밖에 들어오지 않는 부실이라지만 너무 편하게 사신다니까.


문을 닫으려는데, 캐비닛 안의 휴대폰 액정이 깜박거리는 것이 보였다. 혹시 부활동과 관련된 연락인가 싶어 발신인만 확인해두려고 휴대폰을 들었다.


액정 위에 뜬 이름을 확인한 아카아시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잘못 본 것이 아닐까.


눈을 몇 번 깜박이고 난 뒤, 다시 한 번 확인해봤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From. A



/


벌써 몇 시간 째, 보쿠토는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다시 휴대폰을 들어 화면을 확인해 봤지만, 전달 받은 메시지는 아무 것도 없었다.


'A'가 귀가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면 그로부터 대략 1시간 후 Secret mate 앱에 접속하는 것이 보쿠토와 A사이의 암묵적인 룰 이었다. 주로 밖이 깜깜해진 밤 시간대였기에, 이것저것 일상이야기로 시작하다가도 잠이 들기 전엔 제법 무거운 주제로 옮겨가곤 했다. 그런데, 지난 주말부터 'A'로 부터 연락이 없었다. 첫 날에는 오늘은 좀 일찍 잠들었나 싶었다. 다음 날에도 연락이 없자 요즘 좀 바쁜가보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며칠 동안 연락이 오지 않자 보쿠토는 슬슬 초조해졌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건가, 무슨 일이 생겼나, 혹시 자신이 뭘 잘못했나,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연락 좀 해줘어-"


최근에 연애 상담을 부탁한 것이 문제였을까. 그동안 A는 보쿠토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주곤 해서, 이번에도 A가 도움을 주지 않을까 싶어 비밀을 털어놓았었다. 보쿠토는 보낸 채팅창을 열어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대화가 무엇이었는지 다시금 살펴봤다.


B: 나,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A:그러신가요.

B :고백해도 되는 걸까?

A :B씨가 하고 싶으시면 하세요.

B: A군은 역시 엄청 쿨하네.

A:그런 말 자주 듣습니다.

B:아, 그렇지만 고백하는 건 역시 좀 어려운 상대이고. 눈치가 빠른 애라서 좋아하는 거 티 안낼 자신도 없는데….

A:눈치 채일 것 같으시면, 적당히 피해 다니시면 되지 않나요?

B:그게, 오후부터 하루 종일 같이 있는 상대라서 피하기는 좀 어렵네. 그리고 별로 피해 다니고 싶지도 않고, 오히려 더 자주 보고 싶달까.

A: 꽤 어려운 문제네요. 고백하기 어려우신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세요?


저 질문을 받은 뒤의 자신은 상당히 망설였었는지, 답변을 보냈을 때에는 시간이 꽤 흘러있었다.


B: A군 한테라도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네. 말하자면, 차일 것이 뻔히 보인 달까?


그때, 조언을 구하는 입장이었던 주제에 너무 어물어물하게 대답했었나. 혹시 'A'도 자신의 저런 태도가 답답해서 자신과 더 이상 대화를 하기 싫어졌던 것일까. 부정적인 생각이 다시 솟구치려는데, 휴대폰이 울렸다.'A'로 부터 온 메시지였다.


To. B

메시지는 잘 받았습니다. 어떠한 이유인지 잘 모르겠지만, B씨가 힘들어 하시는 것이 전해지는 듯해서 마음이 좋지 않네요. 저도 연애 쪽은 경험이 없어서 별로 좋은 조언을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쪽지를 확인한 보쿠토는 바로 채팅창에 들어갔다.


B: 접속 오랜만이잖아! 무슨 일 있었어?

A: 일이 좀.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B: 아니, 그런 건 괜찮아. 그보다 내가 귀찮게 굴어서 안 들어오는 건가 걱정했다고.

A: 그런 거 아니에요. B씨가 숨김없이 이것저것 말씀해주시면 신뢰받고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기쁩니다.

B: 그렇게 말해주니 좋네. 저기.., 혹시 A군은 나한테 말하고 싶은 비밀 없어?

A: 비밀...아, 저는 B씨와 같은 학교에 다녀요.

B:에? 내가 아는 사람이야? 누구? 몇 학년 몇 반?

A: 안 알려드릴 건데요.

B: 뭐야, 궁금하게! 힌트라도 주면 안 돼?

A: 힌트는 학교에서 드릴 테니 찾아와보세요. 그리고, 오늘은 이만 주무세요.

B: 응, A군도 잘자!



/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쉽게 자신을 발견할 것 같지는 않았다. 보쿠토는 평소처럼 수업을 반쯤 졸면서 듣다가 점심시간 종이 울리면 요란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넉살 좋게 제 앞자리의 의자를 돌려 앉아 턱을 괴고 올려 제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아카아시-오늘 반찬은 뭐야?" 라고 묻는 것도, 방과 후에는 부활동을 하고, 부활동이 끝나면 자율 연습을 하고도. 거의 온 종일 자신과 함께하는데 A를 찾고 싶은 마음이 있기는 한 것인지. 힌트를 줘야하나 말아야하나 헷갈리기 시작했다. 애초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서, 그런데 한눈 팔 시간이 있으신 건가.


"아카아시-내 말 듣고 있어?"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커다란 눈이 훅 다가왔다.


"..뭐라고 하셨죠?"

"뭐야, 역시 안 듣고 있었잖아."

"죄송합니다. 다시 말해주세요."

"으음. 그러니까, 알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자기 이야기 잘 안 하는 사람이라….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돼?"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시는 건가요?"

"아카아시도 본인 이야기 잘 안 하니까, 비슷한 성격 아닐까 싶어서. 아카아시는 어때? 내가 이것 저것 물어보면 대답해 줄거야?"

"... 더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으셨나요?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데."

"또 그런다! 넌 은근히 사람들이랑 거리 두더라. 뭐 좀 물어 보려고 하면 이것도 괜찮다,저것도 괜찮다하고. 본인이 정말 좋아하는게 뭔지 알긴 알아?"

"그런 건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앗, 그게 뭔데?


그렇게도 궁금했는지 상체를 바짝 숙이는 보쿠토에게 아카아시는 젓가락으로 조용히 반찬을 집어 들어 반짝거리는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거요."

"아, 그랬었지."


그런 거 말고- 라며 보쿠토는 잔뜩 기대했다가 실망한 아이처럼 툴툴거렸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지만, 틀림없이 모르시겠지. 힌트를 준다고 줘도 상대방이 감을 못 잡으면 그걸 힌트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다.



/


B: 힌트는 언제 줄 거야?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B, 그러니까 보쿠토 선배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찾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긴 했나 보다.


A : 오늘 학교에서 친한 선배랑 밥 먹었어요.

B: 우연이네. 나도 친한 후배랑 점심 먹었는데. A군은 뭐 좋아해?

A: 이것저것 잘 먹는데요.

B: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은 없어?

A: 딱히요. 골고루 먹는 편이라서. B씨는요?

B: 나는 고기 종류 전부 좋아하지만, 바비큐가 제일 좋아. 그런데, A군은 정말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 없어?

A: 딱히 생각나는 건, 아! 하나 있어요.

B: 뭔데?

A: 유채 겨자무침이요.


힌트는 줄만큼 준 것 같은데 찾아 오실 수 있을지. 



/


 보쿠토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연애도 'A'군 찾기도 진척이 없다. 제 주위에는 왜 이렇게 알기 어려운 사람들만 있는지. 아카아시도 'A'군도 호불호가 확실하고 감정 표현이 잦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데. 가장 알 수 없는 것은 자신은 왜 그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끌리는 것인지였다.


자신이 아카아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예의 바르고 착한 후배라서 그런가. 아카아시는 예의 바르긴하지만, 선배에게도 아닌 점은 아니라고 가차없이 말하는 후배였다.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줘서 일까 싶으면, 다 듣고 나서도 안 들리는 척 하거나 조용히 딴지를 걸 때도 있었다. 아니, 오히려 딴지를 걸며 쿠로오와 함께 선배인 자신을 놀려먹을 때가 더 많았던 것 같았다. 기쁠 때 같이 웃어주고, 힘들 때 다독여 줘서 일까. 그건 다른 배구 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의 기분을 알아줘서 인가 생각해보니, 자신은 감정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타입이고 아카아시는 눈치가 빠른 타입이라 모르는 편이 이상하다.


으으, 생각할수록 더 모르겠다―


"보쿠토, 혼자 또 뭐하고 있냐."


보쿠토가 세상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를 만난 학생처럼 괴로워하며 캐비닛에 실컷 머리를 박고 있을 때, 부실에 들어선 코노하는 밥 먹었냐고 묻는 투로 자연스럽게 물었다.


"나도 몰라, 알려줘!"

"알려주긴 뭘 알려줘."

"너는 눈치 빠른 편이잖아, 좀 알려달라고-"

"그러니까, 뭘 알려달라는건데."


아무리 친구라도 같은 학교 후배를, 그것도 코노하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골머리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머리가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아서 보쿠토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원하는 것은 물어보고 알아내면 그만이다. 


"너, 아카아시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

"응."

"그게 뭔데?"

"배구."

"그건 나도 알고. 배구 말고는? 더 알아? 좋아하는 음식이라든지 ,좋아하는 색이라든지, 이상형이라든지."

"알긴 알지만, 그런 건 아카아시한테 직접 물어보지 그래?"

"알고 있으면 당장 알려줘!"


코노하는 제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재차 묻는 보쿠토를 보며 귀찮은 일을 떠맡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형은... 전에 자기 성격이랑 반대인 사람이랑 있으면 좋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러면 밝게 웃고, 활기찬 성격의 사람일걸? 좋아하는 색은 노란색, 좋아하는 음식은…, 이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왜 물어보냐. 너 항상 아카아시랑 점심 먹잖아."

"...저기, 이유는 묻지 말고 알고 있으면 그냥 좀 알려줄래?"

"그거, 유채 겨자무침이잖아."


코노하는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뭐 하러 물어보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보쿠토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말을 잃었다. 왜 못 알아챘을까. 분명 알고 있었는데. 

보쿠토는 부실 문을 부서져라 밀치고 뛰어나갔다. 호흡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퍼즐 한 조각을 옮기는 순간, 보이지 않던 그림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왔다. 워낙 서두르는 탓에 몇몇 사람들과 부딪쳤고, 간간히  보쿠토를 탓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건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찾아갔던 교실의 문을 열고, 찾던 이를 향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부실에 가 있을 시간인데, 왜 여기로 오셨어요?"


평소와 달리 놀란 표정을 짓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카아시에게 보쿠토는 그가 좋아한다는 밝은 미소를 있는 힘껏 지었다. 아이같이 천진난만한 미소와는 달리 보쿠토의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무언가를 감지한 아카아시가 뒤로 물러서려하자 보쿠토는 그런 그의 어깨를 꽉 잡고 시선을 마주쳤다. 황금빛 눈동자에 꼼짝 없이 시선이 붙들린 순간,


"찾았다."


'나뭇잎 사이로 새어 드는 놓는 햇살은 무슨….'



아카아시에게 보쿠토는 언제나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햇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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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5 쿠로아카데이 : 여름, 합숙

 

 

 

 

뭐 하고 있었더라.


피곤이 쌓였었는지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풍경이 보였다. 여름 합숙에서 일어날 만한 일을 생각해보면, 자신은 아마 배구 연습을 하다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도망쳐서 게임을 하고 있을 켄마를 찾으러 다니는 중이었을 것이다.



합숙 장소는 그룹 내 지역을 번갈아가면서 정해진다고 했다. 저번 해에는 네코마에서 가까운 곳에 별장을 빌려서 지리가 익숙했으나 이번 해에는 정반대의 지역에서 합숙 하게 되었다. 앞을 보지 않고 게임을 하고 다니는 켄마는 자신이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사라져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큰일이네. 켄마는 1학년이기도 하고 낯을 많이 가린다. 때문에 선배들은 물론이고, 같은 학년의 부원들 중에서도 얼굴을 제대로 알고 있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배구부에 들게 된 것도 쿠로오의 권유 때문이었다. 제대로 챙겼어야 했는데.


정신이 멍했다. 포장된 길을 따라 걷고 있긴 하지만, 시야에 담기는 풍경은 같은 도쿄 지역이라 믿기 힘들 만큼 낯설기만 했다. 켄마를 찾기는커녕 쿠로오 본인도 길을 잃은 것 같았다. 하늘은 따가울 정도로 햇빛을 쏘아내렸고, 검은 아스팔트는 유리가루가 흩뿌려 놓은 듯 반짝였다. 연락을 해볼까, 싶다가 멈칫했다. 켄마는 게임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고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여름 운동복 차림으로 아무것도 들고나오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아마도 가까운 곳에서 금방 찾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나온 것이겠지. 그동안 그래 왔으니까.


검은 도로에서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티셔츠를 끌어올려 얼굴의 땀을 닦으며 아, 더워 죽겠다- 라고 생각할 무렵,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상상도 못 한 세월을 살았을 것 같은 거대한 나무였다. 도로 위에 저렇게 큰 나무가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따가운 햇볕에서 벗어나 잠시 동안 쉴 그늘만 있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마침내 그늘로 들어섰다.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서 가지가 흔들리고 푸른 잎이 몇 장 떨어져 내렸다. 비워진 공간 사이로 햇살이 파고들었다. 굳건한 기둥에 햇살이 점점이 더해지면서 나무는 한결 더 생명력을 뿜어냈다. 도쿄에 이런 곳이 있었나. 몸이 나른해졌다. 팔을 뻗어 크게 기지개를 하는데 팔이 어디론가 쑥 밀려 들어갔다. 나무 사이에 틈이 있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틈이었다. 왜 처음에 발견 못 했는지. 혹시 동물이라도 사는 것 아닌가 싶어 검은 공간을 들여다보는데, 안쪽으로는 나무 반대편 길이 보였다. 이제껏 걸어왔던 길과는 달리 나무 뒤편으로는 숲이 연상될 만큼의 나무가 우거져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제 소꿉친구를 찾으려 했던 본래 목적과는 달리, 쿠로오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무 뒤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습기를 머금은 푸른 공기가 더위에 지쳐있던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쿠로오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샘이 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작아 보였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 보자 가늠할 수 없을 깊이였다. 여름 햇빛은 끊임없이 샘 위를 비춰왔지만, 샘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것처럼 고요했다. 여기, 언젠가 와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잔물결이 일었다. 물고기라도 있나 싶어 샘을 들여다보는데 시선이 마주쳤다. 샘을 닮은 고요한 눈동자. 한참 동안 샘을 들여다보는데, 물 안의 인영(人影)은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샘 안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물 안에서 입이 움직이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입 모양을 읽어보려는데, 물이 자꾸만 흔들려서 그것도 쉽지 않았다. 쿠로오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신호라도 보내듯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시선을 따라가자, 쿠로오가 걸어왔던 숲길이 보였다.


“가라는 거야?”


고개를 돌려 샘 속을 바라보자, 물속의 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요, 지금.


구름을 가르고 태양이 나타났다.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샘 위로 일던 잔물결은 어느새 사라지고 물 안의 인영 또한 사라져있었다. 슬슬 돌아갈까.


왔던 길을 되짚어 나무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고 있다. 검은 아스팔트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로 빛을 흡수했다. 길을 따라 걷는데 버스 한 대가 멈춰 섰다. 버스에서 후쿠로다니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내렸고,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라, 쿠로오잖아. 여기서 뭐해?”


이전 합숙에서 만나 친해진 보쿠토였다. 처음 봤을 때 실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2학년이 되자마자 후쿠로다니의 에이스라고 불린다고 전해 들었다.


“친구 좀 찾으러. 그보다 뒤에 있는 애는 누구야?”


활기찬 친구 뒤로는 못 보던 얼굴이 있었다. 새로 들어온 후배인가. 은근히 감이 예리한 저 보쿠토가 같이 다닐 정도라면, 저쪽도 보통은 아닐 터였다.


“아, 새로 들어온 1학년! 내 세터야!”


쿠로오는 새로 들어온 1학년이 세터라는 사실에 잠시 놀랐지만, 자신 만만하게 소개하는 보쿠토의 설명에 쿠로오가 듣고 싶었던 정보는 하나 정도밖에 없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설명에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닫지 못 한 듯,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에 쿠로오는 새로운 후배에게 친히 인사를 건네며 직접 물어보려고 시선을 돌렸다. 차분하고 단정한 얼굴. 바람이 불자 곱슬곱슬한 짧은 머리가 잔물결이 일듯 휘날렸다. 꼭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기분.


“이름, 알려 줄래?


쿠로오가 묻자, 보쿠토 뒤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부원이 고개를 들었다. 도톰한 눈꺼풀이 말려 올라가고 청록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조금 전 머뭇거리고 있던 모습과는 달리 곧은 시선이었다.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담백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잘 어울리는 이름. 그쪽은요? 하고, 자신히 빤히 쳐다보는 새로운 후배에게, 쿠로오는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쿠로오 테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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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아카] Flower boy

HQ 2016. 8. 6. 23:19
쿠로아카전력60분 : 꽃

 

 

 

*호텔 매니저 쿠로오 x 플로리스트 아카아시

*현실의 저는 꽃알못. 실제 저렇게 꽃꽂이해서 얼마나 관리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1.



 

  조용히 밀려와서 부서지는 작은 파도를 닮은 듯, 아래로 향할수록 엷은 하늘색으로 변하는 하얀 대리석 벽. 바깥 세상을 차단하면서도 빛을 흡수하여 호텔 안쪽으로 쏟아내는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곳곳에 비치된 다양한 표정을 지은 천사 조각상들까지. 화려한 내부의 분위기와는 달리 호텔 밖 건물 상단에는 HOTEL NEKO 라는 표기와 함께 심플한 검은색 고양이 로고가 박혀있다. 정말이지, 안팎으로 관광객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모든 요소를 감각적으로 배치해 놓은 곳이었다. 한번이라도 이곳에 눈길을 준 사람은 떠나지 못하는 완벽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하던 쿠로오였다. 그런데,



“면접 보러 왔는데요.”




 화려한 조명 아래에 들어서서 교복이라는 수수하다면 수수한 옷차림으로 꽃다발을 들고 온 청년을 본 순간, 쿠로오는 난생 처음으로 ‘꽃’에 흠뻑 빠져들었다. 진짜, 예뻐.





2.




  난을 치던 선조와, 식물원에 들어가 꽃을 연구 고조부, 개인 온실을 만들 정도로 꽃을 사랑한 증조부, 그리고 지금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작은 꽃집까지. 가문의 흥망성쇠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아카아시가(家)는 대대로 꽃을 다뤄왔다. 인적이 드문 꽃집에 손님이 찾아 올만큼 감성적인 시대는 아니었기에 HOTEL NEKO 런칭 행사를 위해 플로리스트를 구한다는 공고를 본 아카아시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그곳으로 향했다.




  평소와는 다른 노선의 전철을 타고, 앉아있는데 차창밖에 줄줄이 늘어선 크고 작은 건물들이 보인다. 대도시답게 건물마다 개성 있는 로고가 빌딩의 머리위에서 빛나고 있었고, 각 건물의 입구에는 세련된 조각상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노랗게 빛나는 눈을 지닌 검은 고양이가 저 높은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고양이답게 유려한 선과 무늬가 없는 무채색의 심플한 디자인, 그리고 눈에 들어온 조명은 화려한 건물들 사이에서 오히려 더 돋보였다. 신비로운 분위기. 무심한 눈으로 창밖을 바라보던 아카아시는 이내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든 부케의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교복을 입은 남고생이 저녁 무렵에 이런 꽃다발을 들고 돌아다니, 고백이라도 할 건가, 라고 생각하는 듯 호기심이 어린 시선이 따라왔다. 차라리 직접 물어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아니라고 대답할 텐데, 모두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니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다. 아, 빨리 좀 도착했으면.




3.



  “면접, 보러 왔다고 했습니다만.”



  ‘꽃’에 정신이 팔려서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는 쿠로오는 또렷이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그래, 이리로.”



 쿠로오가 손짓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며, 아카아시는 들고 온 꽃다발을 내밀었다. 훅 올라오는 꽃향기에 쿠로오는 다시 정신이 아득해지는 듯 했다.



  “이거, 나 주려고?”

  “샘플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무덤덤한 목소리에 쿠로오는 내가 그런 말을 공고에 썼었던가, 하고 생각하면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꽃다발을 받아들었다. 캔디같이 알록달록한 엶은 파스텔 장미꽃들이 안개꽃과 함께 엷은 연두색 한지에 둘러싸여있었고, 매끄러운 질감의 연하늘색 리본이 그 위를 다시 한 번 흘러가듯 둘러져 있었다. 꽃을 받아들인 쿠로오는 괜히 낯부끄러워 지는듯 했다. 아니, 남고생이 이런 꽃다발을 들고 오면서 아무런 위화감도 들지 않았던건가.




  쿠로오의 안내에 따라 호텔 내부에 있는 어느 방 안으로 들어선 아카아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밖에서 보면 스위트 룸이었는데 들어설 때부터 풀향기가 난다 했더니, 개인 화원을 통째로 옮겨온 듯 온갖 종류의 꽃과 식물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꽃을 다루는 아카아시가(家) 사람으로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만한 방이었지만, 아카아시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그때, 쿠로오가 어디선가 의자 두 개를 찾아와서는 앉으라는 듯, 한 쪽을 툭툭 두드렸다. 아카아시가 의자에 앉고, 방안을 다시 둘러보자 쿠로오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면접이라기 보단 담소를 나누듯 가볍게 질문을 던졌다.



  "고등학생이야?"

  "그런데요. 문제있나요?"

  "아니, 노동법에 위반되는 나이는 아니니 상관없어. 그보다, 들고 온 부케도 꽤 괜찮지만, 그래도 면접이니까 꽃 디자인 해볼래?"

  "테마가 있습니까?"

  "이름이...?"

  "아카아시 케이지 입니다."

  "그럼, 오늘 아카아시군이 보고 느낀 이 호텔 분위기를 표현하는걸로."

  "여기서... 말입니까?"

  "아, 필요한 도구 있으면 말해. 갖다 줄게."



  쿠로오는 뭐든 가져다주겠다는 듯 자신 만만한 표정이었지만 아카아시는 그 말을 신뢰할 수 없었다. 꽃들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늘어놨는데, 플라워 전문 도구가 있을리가.



  "....가위랑 칵테일 잔 몇 개만 갖다 주세요."



  아카아시의 말에 쿠로오는 의아한 듯 다시 되물었다.



  "칵테일 잔?"



  난데없이 칵테일 잔을 준비해 달라는 아카아시의 말에 쿠로오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에 아카아시는 앉아있던 의자에서 일어나 방안의 꽃들에게 시선을 주면서 다소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다.



 "꽃이라고 꼭 부케를 만들거나 화병에 꽂아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쿠로오는 방 안 현관 쪽에 있는 룸서비스용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안내 데스크의 호텔 직원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고 묻는 소리가 넘어왔고, 쿠로오는 아카아시가 부탁한 것을 가져다 달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고, 쿠로오가 문을 열어주자 직원 서너명이 칵테일 잔 몇 개와 색색의 리본, 꽃가위와 화병 몇 개를 방안에 들여놨다. 아카아시는 직원들이 가져온 유리 글라스를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이내 마음에 든 것을 찾았는지, 잔을 내려놓고 꽃 몇 송이와 안개꽃, 꽃가위, 그리고 색색의 리본을 들고 주방 조리대 앞에 섰다. 분명 요리를 하기 위한 공간이었는데, 구비되어 있는 심플한 디자인의 검정색 앞치마까지 두르는 아카아시의 모습은 본인이 평소에 사용하던 작업대 앞에 선 마냥 자연스러웠다. 얇고 긴 손가락이 꽃을 들고 줄기를 정리하고, 꽃잎을 몇 개 따내는 모습은 면접을 보러왔다는 사실은 잊은 듯 평화로워 보였다. 쿠로오는 자신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 평화로운 아카이시의 표정을 보고 괜히 초조한 기분이 들어 발걸음을 옮겨 아카아시의 곁에 다가섰다.



"도와줄까?"

"면접 아니었나요."



  세상 혼자 사는 듯 여유로워 보이더니, 면접 보는 중인 것을 자각하고 있기는 한가 보다. 어찌됐건 꽃에만 시선을 주던 아카아시가 고개를 들어 올려 저를 바라보자 쿠로오는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벌써 결정 난 것 같으니까."


 

  아카아시는 말없이 꽃 몇단과 꽃가위를 들어 쿠로오에게 건냈다.



4.

 

 "줄기는 사선으로 잘라주세요."

 "잎사귀는 몇 장 남겨두는 것이 자연스러워요."




  손이 꼼꼼한 편인 쿠로오는 조용조용히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아카아시의 지시에 따라 초보자치곤 솜씨 좋게 꽃을 정리해서 아카아시에게 내밀었다. 그에, 아카아시는 꽃을 받아서 마무리 커팅을 한 뒤, 조심스럽게 유리잔에 꽂았다. 입구가 넓고 아래로 향할수록 좁아지는 긴 칵테일 잔에 비스듬히 담긴 보라색 붓꽃은 우아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과연 플로리스트.



"꽃은 예쁜데, 우리 호텔과는 무슨 관련이 있는 건데?"

"꽃말이요. 신비로운 사람, 행운, 기쁜 소식이에요."




  이곳 분위기랑 어울리지 않습니까? 라는 말소리가 들렸지만 쿠로오는 대답 해 줄 수 없었다. 잎사귀 같은 청록색 눈동자와 반듯한 콧대, 그리고 색이 엷은 살구색 입술.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한 것이지만 들고 왔던 부케의 파스텔 장미 한 송이를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은 생김새였다. 아니, 생화의 싱그러움보다는 색이 바랜, 하얀색 솜뭉치와 안개꽃으로 채워진 플라워 박스에 담아놓은 드라이 플라워 같이, 성숙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나는 '꽃'이었다.



"......아카아시 군, 우리 호텔에서 평생 일할래?"



탄식하듯이 말을 건내는 쿠로오에게 아카아시는 예상한 일이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당 많이 주신다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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