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5 쿠로아카데이 : 여름, 합숙
뭐 하고 있었더라.
피곤이 쌓였었는지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풍경이 보였다. 여름 합숙에서 일어날 만한 일을 생각해보면, 자신은 아마 배구 연습을 하다가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도망쳐서 게임을 하고 있을 켄마를 찾으러 다니는 중이었을 것이다.
합숙 장소는 그룹 내 지역을 번갈아가면서 정해진다고 했다. 저번 해에는 네코마에서 가까운 곳에 별장을 빌려서 지리가 익숙했으나 이번 해에는 정반대의 지역에서 합숙 하게 되었다. 앞을 보지 않고 게임을 하고 다니는 켄마는 자신이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사라져 있었을거라 생각한다. 큰일이네. 켄마는 1학년이기도 하고 낯을 많이 가린다. 때문에 선배들은 물론이고, 같은 학년의 부원들 중에서도 얼굴을 제대로 알고 있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배구부에 들게 된 것도 쿠로오의 권유 때문이었다. 제대로 챙겼어야 했는데.
정신이 멍했다. 포장된 길을 따라 걷고 있긴 하지만, 시야에 담기는 풍경은 같은 도쿄 지역이라 믿기 힘들 만큼 낯설기만 했다. 켄마를 찾기는커녕 쿠로오 본인도 길을 잃은 것 같았다. 하늘은 따가울 정도로 햇빛을 쏘아내렸고, 검은 아스팔트는 유리가루가 흩뿌려 놓은 듯 반짝였다. 연락을 해볼까, 싶다가 멈칫했다. 켄마는 게임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고 있을지 모르지만, 자신이 여름 운동복 차림으로 아무것도 들고나오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아마도 가까운 곳에서 금방 찾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냥 나온 것이겠지. 그동안 그래 왔으니까.
검은 도로에서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티셔츠를 끌어올려 얼굴의 땀을 닦으며 아, 더워 죽겠다- 라고 생각할 무렵, 커다란 나무가 보였다. 상상도 못 한 세월을 살았을 것 같은 거대한 나무였다. 도로 위에 저렇게 큰 나무가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지만, 따가운 햇볕에서 벗어나 잠시 동안 쉴 그늘만 있다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무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마침내 그늘로 들어섰다. 숨이 트이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서 가지가 흔들리고 푸른 잎이 몇 장 떨어져 내렸다. 비워진 공간 사이로 햇살이 파고들었다. 굳건한 기둥에 햇살이 점점이 더해지면서 나무는 한결 더 생명력을 뿜어냈다. 도쿄에 이런 곳이 있었나. 몸이 나른해졌다. 팔을 뻗어 크게 기지개를 하는데 팔이 어디론가 쑥 밀려 들어갔다. 나무 사이에 틈이 있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틈이었다. 왜 처음에 발견 못 했는지. 혹시 동물이라도 사는 것 아닌가 싶어 검은 공간을 들여다보는데, 안쪽으로는 나무 반대편 길이 보였다. 이제껏 걸어왔던 길과는 달리 나무 뒤편으로는 숲이 연상될 만큼의 나무가 우거져있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제 소꿉친구를 찾으려 했던 본래 목적과는 달리, 쿠로오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나무 뒤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습기를 머금은 푸른 공기가 더위에 지쳐있던 그의 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쿠로오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온 신경이 쏠려있었다. 샘이 있다. 멀리서 봤을 때는 작아 보였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 보자 가늠할 수 없을 깊이였다. 여름 햇빛은 끊임없이 샘 위를 비춰왔지만, 샘은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한 것처럼 고요했다. 여기, 언젠가 와본 적 있는 것 같은데.
잔물결이 일었다. 물고기라도 있나 싶어 샘을 들여다보는데 시선이 마주쳤다. 샘을 닮은 고요한 눈동자. 한참 동안 샘을 들여다보는데, 물 안의 인영(人影)은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샘 안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처럼. 물 안에서 입이 움직이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입 모양을 읽어보려는데, 물이 자꾸만 흔들려서 그것도 쉽지 않았다. 쿠로오가 미간을 찌푸리자, 그는 신호라도 보내듯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시선을 따라가자, 쿠로오가 걸어왔던 숲길이 보였다.
“가라는 거야?”
고개를 돌려 샘 속을 바라보자, 물속의 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세요, 지금.
구름을 가르고 태양이 나타났다. 공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샘 위로 일던 잔물결은 어느새 사라지고 물 안의 인영 또한 사라져있었다. 슬슬 돌아갈까.
왔던 길을 되짚어 나무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고 있다. 검은 아스팔트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정도로 빛을 흡수했다. 길을 따라 걷는데 버스 한 대가 멈춰 섰다. 버스에서 후쿠로다니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이 우르르 내렸고,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라, 쿠로오잖아. 여기서 뭐해?”
이전 합숙에서 만나 친해진 보쿠토였다. 처음 봤을 때 실력이 상당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2학년이 되자마자 후쿠로다니의 에이스라고 불린다고 전해 들었다.
“친구 좀 찾으러. 그보다 뒤에 있는 애는 누구야?”
활기찬 친구 뒤로는 못 보던 얼굴이 있었다. 새로 들어온 후배인가. 은근히 감이 예리한 저 보쿠토가 같이 다닐 정도라면, 저쪽도 보통은 아닐 터였다.
“아, 새로 들어온 1학년! 내 세터야!”
쿠로오는 새로 들어온 1학년이 세터라는 사실에 잠시 놀랐지만, 자신 만만하게 소개하는 보쿠토의 설명에 쿠로오가 듣고 싶었던 정보는 하나 정도밖에 없었다. 보쿠토는 자신의 설명에 문제가 있는 것을 깨닫지 못 한 듯, 대단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에 쿠로오는 새로운 후배에게 친히 인사를 건네며 직접 물어보려고 시선을 돌렸다. 차분하고 단정한 얼굴. 바람이 불자 곱슬곱슬한 짧은 머리가 잔물결이 일듯 휘날렸다. 꼭 어디선가 본 것만 같은 기분.
“이름, 알려 줄래?
쿠로오가 묻자, 보쿠토 뒤에서 분위기를 살피던 부원이 고개를 들었다. 도톰한 눈꺼풀이 말려 올라가고 청록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조금 전 머뭇거리고 있던 모습과는 달리 곧은 시선이었다.
“아카아시 케이지입니다.”
담백하고 다정한 목소리에 잘 어울리는 이름. 그쪽은요? 하고, 자신히 빤히 쳐다보는 새로운 후배에게, 쿠로오는 손을 내밀며 대답했다.
“쿠로오 테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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